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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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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만나는 6·25전쟁 70주년

“비바람이 치던 바다~?♬ 6·25때 부른 뉴질랜드 마오리族 노래”

[6·25 70년, 아직도 아픈 상처]
참전국 대사 인터뷰 [12] 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

 

양승식 기자, 김은중 기자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한국과 뉴질랜드는 그저 전쟁을 함께 치른 것이 아니다”라며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가 70년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70년 전 전쟁 중 불렸던 마오리족의 노래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한국과 뉴질랜드의 유대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최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본지 인터뷰에서 “참전 용사들은 자신들이 불렀던 마오리족의 노래(한국명 ‘연가’)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는 것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며 “뉴질랜드가 이 땅의 평화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라고 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1950년 뉴질랜드 참전 용사로부터 전해졌다. 뉴질랜드의 젊은이들은 당시 마오리족의 노래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를 부르며 향수병을 달랬다. 터너 대사는 “한국과 뉴질랜드는 그저 전쟁을 함께 치른 것이 아니다”라며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가 70년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1950년 유엔이 북한의 남침에 대응해 유엔군 소집을 호소하자 바로 파병에 응답했다. 6000명이 참전해 103명이 전사하거나 다쳤다. 뉴질랜드군은 1951년 4월, 70만 병력을 동원한 중공·북한군의 공세를 가평에서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가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6·25 전쟁은 1·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에 비하면 ‘잊힌 전쟁’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특이한 위상을 가진 전쟁이라고 터너 대사는 설명했다. 터너 대사는 “한국이 일군 ‘한강의 기적’을 보며 뉴질랜드 사람들이 한국의 번영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기여했는지 느끼곤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참전 용사들을 초대해 감사를 표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라며 “참전 용사들뿐 아니라 참전국 입장에서도 감동적이다”라고 했다.


터너 대사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뉴질랜드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감을 줄이는 행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지난 9월 북한이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을 비인간적으로 사살·소각한 것에 대해서는 “뉴질랜드는 전 세계 인권 향상의 강력한 지지자”라고 했다.

 

공동 기획 :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 조선일보

2020.12.10
쾅! 쾅! 빗발치는 중공군의 포격… 목숨 걸고 고지로 내달렸다

[6·25 70주년] 노병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6]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이 67년 전에 있었던 중공군과의 고지전투 상황을 설명하며 훈장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대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지만 전투는 곳곳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 조금이라도 더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판문점에서 사천강을 따라 임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장단·사천강지구는 대표적인 전쟁터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 방어를 맡은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군사분계선을 우리에게 보다 유리하게 정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을 듣기 위해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91)을 대전 자택으로 두 차례 찾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장단전투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1인칭 형식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대전 전신전화국 공무원이었던 나는 육군 통신감실 후발대에 배치돼 통신을 설치하고 파괴하는 일을 맡았다. 통신감실 후발대는 항상 맨 마지막이었다. 철수할 때 다 파괴하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면 그 뒤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전에서 옥천 영동 대구 추풍령 경주 등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북진하면서 대전전화국에 복귀했다. 이때까지 나는 군인 신분은 아니었다.

 

이후 군인이 되자는 생각에 1951년 말 해병대에 지원했고, 이듬해 1월 해병학교 간부후보생 9기로 입대했다. 9개월에 걸친 훈련을 받고 처음 배치된 부대는 서해 도서 부대였다. 백령도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초도가 첫 근무지였다. 남포 앞에 있는 섬으로, 인민군 복장을 하고 북한에 들어갔다 나오는 켈로부대가 활동했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됐다. 최전방이었지만 소대장으로 근무한 3개월 동안 북한군과 교전을 벌인 기억은 없다. 평온한 시기였다.

 

초도에서 장단으로
1953년 1월 임진강 북쪽 지역을 방어하는 해병대 1전투단의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두 번째 부임지에선 상황이 달랐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장단·사천강지구였는데 당시 중공군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집중 공략하던 곳이었다. 내가 맡은 2소대는 임진강과 사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85고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원래 86고지였는데 중공군과 아군이 서로 포로 고지를 때려대면서 1m가량 산이 깎여 85고지라고 불렸다.

 

중공군이 해발 200m 정도 높이의 산을 차지한 반면 아군은 수십 m 높이에 불과한 구릉에 전초기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해가 떨어질 무렵에는 눈이 부셔 중공군이 있는 서쪽을 쳐다보기조차 힘든 불리한 지형이었다.

 

중공군은 주로 야간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철조망 위에 멍석을 깐 뒤 이를 밟고 넘어오는 식이어서 철조망이 매번 망가졌다. 그 덕에 낮에는 철조망을 치고 참호를 파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대원들은 철조망 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소위는 하루살이로 불렸다. 늘 적 저격수의 타깃이 됐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는 계급장도 달지 않고 전장을 누볐다. 붙잡히면 죽으려고 자폭용 수류탄도 늘 달고 다녔다. 소대장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보다 부하를 많이 감싸줘야 하는 자리였다.

 

중공군의 심리전
중공군은 다양한 방법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전사한 아군 시신을 거둘 때를 이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밤이나 새벽을 이용해 시신 수습 작업을 하다 다치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 밑에 중공군이 설치해둔 폭발물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신을 방치하면 중공군은 확성기를 통해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 죽으면 시체도 안 가져가는데 뭐 때문에 싸우느냐”며 심리전을 펼쳤다. 나중에 우리도 요령이 생겼다. 시신을 수습해 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밤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시신에 접근한 뒤 끈으로 묶고 멀찍이 떨어져서 잡아당겼다. 이렇게 하면 숨겨진 폭발물이 터지더라도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판문점 옆에 포진지를 설치하고 아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아군이 적의 포진지를 겨냥해 쏜 포탄이 판문점에 떨어지거나 파편이 판문점 안으로 날아들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알면서도 대응하지 못했다. 중공군들은 위장전술에도 능했다. 철모를 쓰지 않고 머리에 띠를 두른 뒤 솔잎과 낙엽을 끼우고 마치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밤낮으로 그렇게 했다.

 

지옥 같았던 고지전
1전투단 소대장을 맡은 지 3개월이 지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길 내심 기대했다. 후배 소대장이 오면 교대할 차례가 된 때 고지 탈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중대 소대장들 중에 동기생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내가 걸렸나’라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전투만 피하면 살 수 있는데 마지막으로 네가 걸렸다”는 얘기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1953년 4월 23일 오전 4시. 85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아군이 고지 정상을 향해 포를 쏘자 중공군도 올라오는 길목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나와 소대원 44명은 고지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소대의 별명이 ‘돌격소대’였다. 비처럼 포탄들이 쏟아지고 뿌연 흙먼지가 솟구쳐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지만 작전을 감행했다. 지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기는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사람이 많은 것으로 오해하도록 우리는 여러 명이 호각을 불면서 올랐다.

 

5분 능선에 이르렀을 때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자 중공군들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사격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내 앞에서 터졌다. 따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안에 물 같은 게 자꾸 고였지만 팔로 닦아 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핏물이 넘쳐 턱 주변은 피투성이가 됐다. 나중에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수류탄 파편이 얼굴과 목 등 7곳에 박혔고, 파편에 맞은 생니가 빠지면서 피가 쏟아진 사실을 알았다. 옆에서 이를 본 소대원들은 전투가 끝난 뒤 “소대장 턱이 날아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8분 능선을 지나 고지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서로 총을 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와 중공군은 가까워졌다. 육박전이 곧 시작될 상황이었다. 이때 중대장은 우리 소대에 후퇴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정상 부근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중공군의 수류탄이 터졌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소대원들은 전투를 이어갔고, 공격 시작 1시간 만에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나는 전투가 끝난 뒤 헬기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미군 병원선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았다. 고지 점령 소식은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전투의 성과로 나는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해병교육단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을 맞이했다. 육군 통신감실 후발대와 해병 소대장으로 치른 나의 6·25는 이렇게 끝났다.


▼ 16개월의 서울 방어전… 중공군 대규모 공격 격퇴 ▼

6·25전쟁 격전지였던 장단·사천강지구에는 현재 도라산전망대(경기 파주시 장단면)가 서 있다. 해병대가 서울을 위협하는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지금의 군사분계선이 그어질 수 있었다.

 

1952년 3월 18일에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휴전 때까지 이어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해병대 장병 776명이 전사했다. 중공군은 8215명이 숨졌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주요 전투’).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해 수도권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해병대가 선정한 7대 작전(월남전 포함)에 포함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25전쟁 때 이곳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91)의 ‘작은 소원’은 장단·사천강지구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는 휴전을 3개월 앞둔 1953년 4월 23일 고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헬기로 후송되면서 전쟁터를 떠났다. 1973년 전역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25년간 이민생활을 하다가 2010년에 귀국해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6·25 당시 같은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동기 고두희 예비역 해군 대령과 함께 올봄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다.

 

지 중령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격전지를 찾아가 먼저 간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부상당한 85고지에 가서 수류탄 파편에 맞아 빠진 내 아랫니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미국에 있을 때부터 했다”며 “지금은 없겠지만 마음적으로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대전=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2020.06.20
[6·25와 여군] 전방 GOP도 여성 대대장이… 위상 높아지는 여군

[6·25 70년, 여군이 있었다] ③
영관급 5.9%가 여군

 

한때 '여군'이라는 존재와 단어가 생경할 때가 있었다. 군이라는 조직의 태생과 뿌리 자체가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창설된 여군은 남성 중심 조직을 비집고 들어온 이방인 그룹에 가까웠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이제는 지원병과는 물론 거의 모든 전투병과에 진출하고 '투스타' 사령관까지 배출하면서 이제는 여군의 위상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군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게 군 안팎의 평가다.


전체 여군 규모는 2000년 전까지 1,500명 수준에 그쳤다. 또 대부분 간호, 행정 보직이었다. 그러나 여군은 이후 매해 1,000여명 이상 증가해 2015년 9,700명, 2016년 1만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여군은 1만2,600여명으로, 전체 병력(57만9,000명)의 2.2%, 간부(19만8,000명)의 6.8%에 이른다. 내년엔 8.1%, 2022년엔 8.8%까지 증가할 것으로 국방부는 전망하고 있다.

 

한때 '여군'이라는 존재와 단어가 생경할 때가 있었다. 군이라는 조직의 태생과 뿌리 자체가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창설된 여군은 남성 중심 조직을 비집고 들어온 이방인 그룹에 가까웠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이제는 지원병과는 물론 거의 모든 전투병과에 진출하고 '투스타' 사령관까지 배출하면서 이제는 여군의 위상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군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게 군 안팎의 평가다.

 

전체 여군 규모는 2000년 전까지 1,500명 수준에 그쳤다. 또 대부분 간호, 행정 보직이었다. 그러나 여군은 이후 매해 1,000여명 이상 증가해 2015년 9,700명, 2016년 1만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여군은 1만2,600여명으로, 전체 병력(57만9,000명)의 2.2%, 간부(19만8,000명)의 6.8%에 이른다. 내년엔 8.1%, 2022년엔 8.8%까지 증가할 것으로 국방부는 전망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각 군 본부 등 주요 정책 기관에 진출하고 있는 영관급 여군 비율이다. 전체 여군 규모는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반면 주요 기관 진출 비율은 미진해 고질적 '유리천장'이 여군의 고위직 진출을 막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군 당국은 주요 기관 특성에 맞는 여군 보직 기준을 훈령에 명시했고, 그 결과 2018년 5.4%에 불과했던 영관급 여군 비율은 지난해 5.9%로 증가했다.

 

 

 

 

장성급 여군도 꾸준하게 배출되고 있다. 2001년 첫 여성 장군(양승숙 준장ㆍ간호병과) 탄생 이후 2010년 송명순 준장이 전투병과에서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지난해엔 강선영 육군 준장이 항공작전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창군 이래 최초의 여군 소장도 탄생했다.


전투병과 진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2003년 여군 장교가 처음으로 해군 전투함에 배치됐고, 2007년 공군에선 첫 여군 전투기(KF-16) 조종사가 배출됐다. 지난해의 경우 육군 최초의 해안경계부대 중대장(정희경 대위), 해군 첫 해상초계기(P-3) 조종사(이주연 소령), 공군 첫 비행대대장(편보라 중령) 등 최초 타이틀을 단 여군이 연이어 탄생했다. 지난해 기준 전투병과에 배치된 여군 비율은 30%를 웃돈다.


대표적 접적지역인 최전방 GOP(일반전초)대대의 중ㆍ소대장에도 여군들의 본격 진출이 예고됐다. 국방부는 2018년 '국방개혁 2.0' 일환으로 모든 영역의 중ㆍ소대장 직위에 여군 진출 제한을 폐지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12월 여군 첫 GOP 대대장(권성이 중령)이 탄생했으나, 전체 숫자는 여전히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까지 GOP 210개소에 여군 시설이 신설ㆍ확충됨에 따라 수년 내 전방에서 근무하는 여군 비율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군 당국은 내다보고 있다. 


물론 여군에 대한 군 내부의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성 상급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점도 군 당국의 고민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여군이 군 내에서 불편한 존재로 인식됐던 것은 여군을 위한 근무 여건이 미비했던 측면도 있다"며 "근무 환경이 최근 개선되면서 여군의 능력과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2020.06.24
"K-방역마스크, 네덜란드에서도 감동이었어요"

[70년 기다림, 감동의 70분]

요안느 도너바르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 인터뷰

 

지난 6월 25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국군 전사자 147구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날 70분간의 행사 곳곳에서 눈물이 번졌다. 긴 기다림 끝의 짧은 만남. 그 의미를 재조명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 김병기, 이희훈 기자

 

 


요안느 도너바르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 ⓒ이희훈

 


"리스펙트!"(respect 존경, 존중)

 

요안느 도너바르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의 답변은 감탄사였다. 6.25 전쟁 70주년에 참석했던 소감을 묻자 돌아온 반응이다. 이날 6·25 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한 행사에서 대한민국은 6.25 전쟁 참전국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의 답변에서는 70년 전 참전국을 예우하고 기억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존경심도 묻어났다.

 

"평화(peace)와 대화(dialogue)."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가 이날 행사에서 느꼈다는 핵심 키워드이다. 그는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배워야할 교훈도 "평화와 대화의 소중함"이라고 했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정동빌딩에 있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1시간여 동안 만난 그는 '전쟁의 기록과 기억'의 소중함도 전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3개 키워드로 재구성했다.


 
[키워드 ① 존경심] 70분의 특별한 행사, 3가지 핵심 메시지

"그날 행사는 특별했다. 제가 그곳에 참석한 게 영광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당초 행사가 축소됐지만, 네덜란드 총리와 참전국 대표들도 스크린으로 참석했다."

 

세계 유일 UN군 묘지인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 의장이기도 한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지난 행사 때 22개국의 6.25 전쟁 참전국을 대표해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평화의 패'를 수여받았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 평화의 패를 들어 보이면서 "정말 무겁다"며 "무언가를 녹여 만든 것은 강해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화의 패'를 만든 주물은 6.25 전쟁 때 참전했던 22개국의 기억을 한데 합친 것이었다. 미군의 수통, 영국군 참전 배지, 캐나다군 총검집, 프랑스 참전대대 배지, 태국군 반합, 스웨덴 참전 간호사가 사용했던 단추와 놋그릇, 인도군의 들것 손잡이, 이탈리아군 의료용 톱 등이 들어갔다. 여기에 화살머리고지에서 수거한 DMZ 철조망도 한데 녹였다.

 

그는 "제가 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전용사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영광의 패"였다면서 "유엔참전국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에게 6.25 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아달라고 했더니 "공군비행기에서 전사자들의 유해가 한구씩 나오면서 70년만에 조국의 품에 안기는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웅장했고 존엄스러웠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300명 탑승객이 비행기 폭파 사고로 사망했을 때 네덜란드 사망자의 유해를 한구씩 옮겼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70년이 지났는데도, 그분들을 잊지 않고 조국으로 모신 것이기에 큰 의미가 있고, 진심을 다해서 통일을 염원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도 인상 깊었습니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가 느낀 행사의 주요 메시지는 존경심이었다. 6.25 참전국을 잊지 않는 대한민국, 6.25 전쟁을 통해 평화와 통일을 배운 대한민국, 마지막으로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이날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122,609명의 전사자를 마지막 한 분까지 끝까지 찾겠다는 국가의 약속을 담은 '122,609 태극기' 배지달기였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를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배지를 패용했다.

 

 

[키워드 ② 기록과 기억] 네덜란드 군인의 딸이 기록한 전쟁의 의미

 

 요안느 도너바르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 ⓒ이희훈

 


"이 책은 6.25 전쟁 때 참전했던 네덜란드 군인의 딸이 쓴 것입니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인터뷰 도중에 두꺼운 책을 꺼내들었다. 제목은 . 네덜란드군이 고국의 자녀들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들어있는 총천연색 책자. 네덜란드어로 씌여진 6.25 전쟁의 기록이었다. 저자는 프랑스와 아펠스, 책 디자인은 그래픽 디자이너인 그의 동생이 맡았다고 한다.

 

"딸이 참전한 아빠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기록이 망라됐습니다. 네덜란드 전투부대는 강원도 횡성에 투입됐는데, '산악지형이어서 어려웠다' '네덜란드에는 산이 없는데, 산을 정복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춥다' 등의 이야기도 들어있죠. 참전용사가 조국으로 보낸 편지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전쟁 때 한국 민간인들이 겪은 비극적인 삶도 드러나 있죠."

 

그는 책장에 붙어 있는 종이 주머니처럼 된 공간에서 크리스마스카드도 꺼내보였다.

 

"참전용사의 딸이 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고 책의 집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의복을 볼 수 있고, 아이들이 연 날리는 모습도 그려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카드를 보낸 참전용사는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할 때 끼고 있던 반지를 지금도 끼고 있어요."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6.25 전쟁 70주년을 기념해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글로 대사관 소셜미디어 채널을 통해 전했다"면서 "참전용사들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분들의 소중한 경험이 잊혀질 수 있었는데, 자녀분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6.25 전쟁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당시 네덜란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6.25 전쟁 때 네덜란드는 유엔군으로서는 첫 번째로 회원국들을 향해 파병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네덜란드 군인들은 자원입대했고, 6.25 전쟁은 네덜란드가 참여한 두 번째 세계전쟁이었습니다. 네덜란드도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는데, 지금도 우리는 다른 나라들의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6.25 전쟁 참전용사를 우선시하는 건 아니지만, 네덜란드는 모든 참전용사들을 예우하고 있다"면서 "매년 5월 4일에는 6.25 전쟁 참전비 앞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있고, 전쟁 당시 쓰였던 군복과 메달 등 상징물을 보관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매주 목요일 아침에 참전용사들이 만나서 그곳에서 커피도 마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젊은 시절, 먼 이국 땅인 한반도에서 총을 함께 들었던 네덜란드 참전용사 2명이 2년 전에 사망했다. 이들의 유언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분들의 전우애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서 "네덜란드에서 유복한 삶을 누렸던 이들은 유가족들이 자주 방문할 수 있는 고국보다 유엔기념공원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2명의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이 묻힌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이다. 세계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전 세계 6.25 전쟁 참전용사들의 영원한 기록과 기억의 공간이자, 예우의 공간이기도 하다.

 

 

[키워드 ③ 평화와 대화] 네덜란드를 감동시킨 K-방역마스크

 

요안느 도너바르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받은 기념패를 보여주고 있다. ⓒ 이희훈

 

 

6·25 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끝까지 찾아야 할 122609 태극기 캠페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왔다. 지난 7월 27일에는 6․25 전쟁 당시 함께 대한민국을 지킨 22개국 195만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올해 행사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참전국과 참전용사들을 잊지 않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면서 "대한민국의 유엔 참전군 재방한 프로그램으로 방한한 네덜란드 용사들도 폐허가 됐던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면서 너무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할까? 그에게 물었더니 "전쟁의 참혹함"이라고 답변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평화의 소중함'이다. 그는 "6.25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는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배워야 한다"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사상자들이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빌어서 한 가지 덧붙였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대화'의 중요성이었다.

 

"정전협정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갈등이 생길 때 전쟁을 방편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잔인하고 헛된 전쟁에서 해결책을 찾은 이후가 아닌, 그 전에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줄일 수 있는 지혜를 모든 국가가 배워야 한다고 말했죠.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나고 있지만,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평화와 대화가 중요합니다."

   
대화는 비단 갈등과 분쟁의 대상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또 말로만 주고 받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대한민국이 전 세계 참전용사들에게 'K-방역마스크'를 전달하는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70년 전 참전에 대한 보답이었죠.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도 한국전참전용사협회와 함께 요양원에 계시는 유엔찬전용사들에게 마스크를 전달했습니다. 우리도 마스크가 부족한 상태였고, 대한민국도 마스크를 수출 금지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 사업에 대해 네덜란드 신문에도 실리기도 했습니다."

 

K-방역마스크 역시 대화였다. 6.25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국에 보내는 고마움의 표시이자, 계속해서 함께 하자는 평화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지난 5월에 한국 정부는 네덜란드에 생존해 있는 170여명의 참전 용사와 이들을 돌보는 가족, 의료진을 위해 총 2만장의 마스크를 전달했다. 22개 참전국에게 보내준 마스크를 합치면 총 100만개에 이른다.

 

당시 6·25 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처했던 6·25 전쟁 당시 유엔참전용사가 보여준 희생과 공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마스크를 지원한다"면서 "22개 참전국 모두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으로, 특히 이 바이러스에 취약한 고령의 유엔참전용사(평균 88세)에게는 마스크 지원이 매우 시급한 실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요안느 도너바르트 대사는 "당시 한국에 있어서 마스크를 전달받은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저에게 전달된 사진만 봐도 한국 정부에 너무 고마워하는 마음이 읽혀졌다"면서 "네덜란드는 대한민국과 함께 전 세계의 평화와 법치주의의 수호를 위한 국제적인 동조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한 네덜란드 대사로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 등을 위해 한 마디 보탰다.


"내년은 네덜란드와 대한민국의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선 무역의 경우, 대한민국은 중국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입니다. 한국도 네덜란드를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길목으로 보고 있고 주요 교역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죠. 양국간 유학생들의 교류도 튼튼합니다. 사실 이게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죠.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는데, K-뷰티, K-POP 때문입니다. 한국사람 중 네덜란드 건축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반적인 양국 관계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법치주의와 기후변화, 인권 등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관계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 네덜란드는 6.25전쟁 참전국이었다. 지금은 주요 경제 교역국이며, 서로의 문화와 교육 등 사회 전반의 관계를 나누는 관계로 진화하고 있다.

[* 통역 : 류예나(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기획단 통역가)]
 

202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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