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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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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빗발치는 중공군의 포격… 목숨 걸고 고지로 내달렸다

2020.06.20 조회수 3081

[6·25 70주년] 노병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6]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이 67년 전에 있었던 중공군과의 고지전투 상황을 설명하며 훈장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대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지만 전투는 곳곳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 조금이라도 더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판문점에서 사천강을 따라 임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장단·사천강지구는 대표적인 전쟁터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 방어를 맡은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군사분계선을 우리에게 보다 유리하게 정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을 듣기 위해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91)을 대전 자택으로 두 차례 찾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장단전투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1인칭 형식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대전 전신전화국 공무원이었던 나는 육군 통신감실 후발대에 배치돼 통신을 설치하고 파괴하는 일을 맡았다. 통신감실 후발대는 항상 맨 마지막이었다. 철수할 때 다 파괴하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면 그 뒤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전에서 옥천 영동 대구 추풍령 경주 등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북진하면서 대전전화국에 복귀했다. 이때까지 나는 군인 신분은 아니었다.

 

이후 군인이 되자는 생각에 1951년 말 해병대에 지원했고, 이듬해 1월 해병학교 간부후보생 9기로 입대했다. 9개월에 걸친 훈련을 받고 처음 배치된 부대는 서해 도서 부대였다. 백령도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초도가 첫 근무지였다. 남포 앞에 있는 섬으로, 인민군 복장을 하고 북한에 들어갔다 나오는 켈로부대가 활동했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됐다. 최전방이었지만 소대장으로 근무한 3개월 동안 북한군과 교전을 벌인 기억은 없다. 평온한 시기였다.

 

초도에서 장단으로
1953년 1월 임진강 북쪽 지역을 방어하는 해병대 1전투단의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두 번째 부임지에선 상황이 달랐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장단·사천강지구였는데 당시 중공군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집중 공략하던 곳이었다. 내가 맡은 2소대는 임진강과 사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85고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원래 86고지였는데 중공군과 아군이 서로 포로 고지를 때려대면서 1m가량 산이 깎여 85고지라고 불렸다.

 

중공군이 해발 200m 정도 높이의 산을 차지한 반면 아군은 수십 m 높이에 불과한 구릉에 전초기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해가 떨어질 무렵에는 눈이 부셔 중공군이 있는 서쪽을 쳐다보기조차 힘든 불리한 지형이었다.

 

중공군은 주로 야간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철조망 위에 멍석을 깐 뒤 이를 밟고 넘어오는 식이어서 철조망이 매번 망가졌다. 그 덕에 낮에는 철조망을 치고 참호를 파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대원들은 철조망 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소위는 하루살이로 불렸다. 늘 적 저격수의 타깃이 됐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는 계급장도 달지 않고 전장을 누볐다. 붙잡히면 죽으려고 자폭용 수류탄도 늘 달고 다녔다. 소대장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보다 부하를 많이 감싸줘야 하는 자리였다.

 

중공군의 심리전
중공군은 다양한 방법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전사한 아군 시신을 거둘 때를 이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밤이나 새벽을 이용해 시신 수습 작업을 하다 다치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 밑에 중공군이 설치해둔 폭발물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신을 방치하면 중공군은 확성기를 통해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 죽으면 시체도 안 가져가는데 뭐 때문에 싸우느냐”며 심리전을 펼쳤다. 나중에 우리도 요령이 생겼다. 시신을 수습해 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밤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시신에 접근한 뒤 끈으로 묶고 멀찍이 떨어져서 잡아당겼다. 이렇게 하면 숨겨진 폭발물이 터지더라도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판문점 옆에 포진지를 설치하고 아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아군이 적의 포진지를 겨냥해 쏜 포탄이 판문점에 떨어지거나 파편이 판문점 안으로 날아들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알면서도 대응하지 못했다. 중공군들은 위장전술에도 능했다. 철모를 쓰지 않고 머리에 띠를 두른 뒤 솔잎과 낙엽을 끼우고 마치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밤낮으로 그렇게 했다.

 

지옥 같았던 고지전
1전투단 소대장을 맡은 지 3개월이 지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길 내심 기대했다. 후배 소대장이 오면 교대할 차례가 된 때 고지 탈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중대 소대장들 중에 동기생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내가 걸렸나’라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전투만 피하면 살 수 있는데 마지막으로 네가 걸렸다”는 얘기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1953년 4월 23일 오전 4시. 85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아군이 고지 정상을 향해 포를 쏘자 중공군도 올라오는 길목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나와 소대원 44명은 고지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소대의 별명이 ‘돌격소대’였다. 비처럼 포탄들이 쏟아지고 뿌연 흙먼지가 솟구쳐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지만 작전을 감행했다. 지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기는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사람이 많은 것으로 오해하도록 우리는 여러 명이 호각을 불면서 올랐다.

 

5분 능선에 이르렀을 때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자 중공군들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사격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내 앞에서 터졌다. 따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안에 물 같은 게 자꾸 고였지만 팔로 닦아 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핏물이 넘쳐 턱 주변은 피투성이가 됐다. 나중에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수류탄 파편이 얼굴과 목 등 7곳에 박혔고, 파편에 맞은 생니가 빠지면서 피가 쏟아진 사실을 알았다. 옆에서 이를 본 소대원들은 전투가 끝난 뒤 “소대장 턱이 날아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8분 능선을 지나 고지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서로 총을 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와 중공군은 가까워졌다. 육박전이 곧 시작될 상황이었다. 이때 중대장은 우리 소대에 후퇴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정상 부근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중공군의 수류탄이 터졌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소대원들은 전투를 이어갔고, 공격 시작 1시간 만에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나는 전투가 끝난 뒤 헬기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미군 병원선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았다. 고지 점령 소식은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전투의 성과로 나는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해병교육단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을 맞이했다. 육군 통신감실 후발대와 해병 소대장으로 치른 나의 6·25는 이렇게 끝났다.


▼ 16개월의 서울 방어전… 중공군 대규모 공격 격퇴 ▼

6·25전쟁 격전지였던 장단·사천강지구에는 현재 도라산전망대(경기 파주시 장단면)가 서 있다. 해병대가 서울을 위협하는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지금의 군사분계선이 그어질 수 있었다.

 

1952년 3월 18일에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휴전 때까지 이어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해병대 장병 776명이 전사했다. 중공군은 8215명이 숨졌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주요 전투’).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해 수도권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해병대가 선정한 7대 작전(월남전 포함)에 포함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25전쟁 때 이곳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지형열 예비역 해병 중령(91)의 ‘작은 소원’은 장단·사천강지구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는 휴전을 3개월 앞둔 1953년 4월 23일 고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헬기로 후송되면서 전쟁터를 떠났다. 1973년 전역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25년간 이민생활을 하다가 2010년에 귀국해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6·25 당시 같은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동기 고두희 예비역 해군 대령과 함께 올봄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다.

 

지 중령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격전지를 찾아가 먼저 간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부상당한 85고지에 가서 수류탄 파편에 맞아 빠진 내 아랫니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미국에 있을 때부터 했다”며 “지금은 없겠지만 마음적으로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대전=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