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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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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숨은 영웅, '우리는 대한민국 여군이었다'전

2020.12.24

 

2020년은 여군 70주년의 해라는 소식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여자의용군 교육대 창설을 ‘여군 창설’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여자의용군은 6.25에 참전한 여군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자의용군 이전에 한국 군대에는 여자가 없었던 걸까요? 전쟁 속에서 참전 여군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 전시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군이었다’는 그동안 그 활약상에 비해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참전 여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귀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 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군이었다’ 전시장 입구.

 

먼저, 무슨 의도로 전시를 계획하였는지 알아야겠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 여군들은 그 활약상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참전 여군의 수는 약 2,400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수에 비하면 우리의 의식 수준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이에,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전시가 기획되었습니다. 모든 일의 첫걸음은 ‘기억’ 자체이니만큼, 이 전시가 갖는 의의는 큽니다. 

 

“본 전시는 오랫동안 먼지 쌓인 채 잊힐 뻔했던 참전 여군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낡고 빛바랜 대한민국 여군들의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국가 수호를 위해 헌신한 여성 참전 용사들의 ‘땀’과 ‘피’ 그리고 ‘눈물’을 기억하고, 잠시나마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프롤로그, ‘전시를 열며’ 중에서

 

올해는 여군이 창설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데, 여군참전사를 보면 1948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궁금증이 해결될 시간인 것 같네요.

 

1948년, 간호장교 31명이 임관합니다. 누가 ‘여군’의 시초냐를 엄격하게 따진다면 1948년을 기준으로 잡아야 할 텐데, 왜 우리는 1950년을 기준으로 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김현숙 대령이 9월 6일에 여군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9월 4일 이전에 이병하시고, 4일부터는 이병 후 훈련을 시작하셨으니 참된 의미의 ‘시작’이 9월 6일은 아닌 셈이에요. 그렇지만, ‘여군기’의 상징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점을 생각해두어야 하겠습니다. 또 그 날 교육대가 정식으로 발족되기도 하였지요.

 

이 전시는 여자의용군만이 아닌 참전 여군을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1948년을 여군의 시초로 보는 기준을 택하였습니다. 그 후, 베트남 파병인원이 완전 철수하는 1973년까지가 이 전시가 소개하는 ‘여군 참전사’입니다. 전시는 참전 여군 자체가 주제이니만큼, 베트남 전쟁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량상 베트남 파병은 다루지 못할 거라는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군이었다’ 전시장 내부. 

 

입구로 들어가면 사진이 겹쳐진 듯한 모양이 보입니다. 차례로 여자의용군-해병-여자항공대-참전 간호장교 순인데요. 이를 통해 관람객은 한눈에 참전 여군을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전시가 진행될지 미리 보는 셈이네요. 참신하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나요?

 

<여성도 군으로 들어오다> - 여자의용군


“키 148cm였던 나는 여자의용군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불합격자들은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이복순, 여자의용군2기 (출처 : 동아일보 인터뷰 中)

 

첫 번째 챕터인 <여성도 군으로 들어오다>에서는 여자의용군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자의용군’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누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타오르는 열정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여자의용군 1기는 500명을 모집한다고 공고를 냈으나 2,000명이 모여들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여성들의 엄청난 열의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복순 선생님의 인터뷰에서도 그 간절함을 작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 정도로, 그들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쳐 선발된 1기생들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이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을 거쳐 491명만이 통과하여 남게 되었는데, 이분들이 바로 ‘최초의 여군’입니다. 이후 2기, 3기가 추가 모집되었고 이들은 전쟁터에서 활약상을 펼쳐 나갔습니다.

 

당시 ‘여자의용군’ 소식을 담은 신문 기사. 

 

<내 군번을 영원히 사랑한다> - 해병


아마, 현직 군인이시라면 ‘군번’이 지니는 의미는 특별할지도 모릅니다. 자연적으로 부여되는 ‘주민등록번호’와는 달리, 자신이 성취해낸 직업의 증표이며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해병을 소개하는 전시의 제목이 <내 군번을 영원히 사랑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길화 선생님께서도 군번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전시에 적힌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 깊어 여기에도 옮겨 봅니다.

 

“내 군번은 91049! 내 주민등록과 같이 살아 있을 이 숫자, 나의 인생 여로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 숫자를 영원히 사랑하며 오래 기억하리라.”- 강길화, 해병 4기

 

참전 여군 중 해군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해군 여자 해병’, ‘해군 간호 장교’가 그것입니다. 먼저, ‘해군 여자 해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해병 4기를 모집했고, 126명이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린 학생들은 돌려보내고, 남은 75명만이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태극기를 가슴에 두르고 입대했다고 합니다. 태극기는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상징입니다. 그것을 두르고 입대하다니, 그들의 결의가 느껴지시나요? 

 

‘최초의 여군 해병이 입대시 두른 태극기’전시품


해군 간호 장교는 ‘병원선’에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간호 자격증 소지자 중 선발해 군사 교육을 수료한 뒤 임관한 이들인데, 의무 지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현지 교육·임관을 통해 간호 인력을 보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해군 최초이자 마지막 병원선에 배치된 장교들은 진해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해군은 해군진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그걸 운반할 병원선이 필수적이었으니까요. 이들 58명은 전시에서 ‘바다 위의 나이팅게일’로 표현되는데, 그 뜻을 저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지를 진동시키는 엔진 소리에 마음이 동요되다> - 여자항공대


1949년 2월, 여성 인재 중 15명이 여자항공대 1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후배 2기 239명이 입대해 교육을 받던 중, 6.25가 발발하였습니다. 전황이 다급해지자 공군은 여자 항공대를 해체, 귀가 조치를 합니다. 이들 중 26명은 자진 복귀하여 목숨을 걸고 업무를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2기 여자항공대를 교육 중이었는데, 그것을 해체할 정도라면 전황이 한국에게 아주 불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자진 복귀하고자 했다니, 그 마음은 제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것 같아요.

 

비록 남자들과는 달리 전쟁 중 조종 기회는 없었지만, 그들의 업적이 빛바래는 것은 아닙니다. 공군 본부, 비행단, 참모부 등에서 업무를 수행한 것은 그 누구도 얕볼 수 없을 거예요.

김경오 중위님은 정전 후 부대에 남아 비행 교육을 마치고, 1954년 최초의 단독 비행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난’ 것인데, 그 해방감과 성취감은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공군과 해군의 군복. 

 

이렇게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군이었다’ 전시를 함께 보았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군이 사회에서 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금,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바로, ‘참전 여군’은 잘 알려지지 않은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참전 여군’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어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여자가 군대에 간다는 것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이고, 그 편견은 과거에는 더욱 극심해 참전 여군을 괴롭혔습니다. 여자가 무슨 군대냐는 둥, 기가 세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요. 그런 사회의 시선 탓에 자신이 참전했노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후 70년이 지났습니다. 70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지지요. 그때 태어난 아이가 70살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이제 와서 참전 여군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그들을 기억하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걸 수행하는 건 젊은이들의 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기해내고, 그들의 헌신에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