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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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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학도병 자취를 찾아서, 소병민 중령상과 고교 충혼탑

2020.12.30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북 지역 학도병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주역 남행열차편으로 출정하였습니다. 저는 이번에 남행열차편으로 출정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한 고등학교 부지에 지어진 충혼비를 주제로 취재했습니다.

 

충혼비가 세워진 학교 앞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날씨는 따사롭고도 평화로웠습니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다 문득 고등학교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군인 복장의 동상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위국단충(爲國丹忠,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충정)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동상 주인공은 바로 소병민 중령입니다. 소병민 중령은 1952년 육군 보병학교를 나와 갑종 16기 육군 장교로 임관돼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1968년 충남 서산지구 무장 공비 소탕작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향년 39세로 전사하고 맙니다.

 

정부는 1968년 고 소병민 중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전북도민은 그의 죽음을 기리고 뜻을 받들어 애국심에 귀감을 삼고자 성금을 모아 1970년 모교에 동상을 건립합니다. 여담으로 소병민 중령 동상 제막식에는 김재규 보안 사령관이 특별 참석했다고 합니다.

 

 

동상을 지나 교문으로 들어서니, 나무 사이 감춰져 있던 충혼탑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충혼탑 비문에는 탑이 어떤 연유로 세워졌는지 적혀 있습니다. 저는 경건한 마음으로 비문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교직원 400여 명이 위기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붓 대신 총을 들고 용감하게 떨쳐 일어났습니다. 학도용사들은 포항, 안강과 38선 근처에서 분투하며 무훈을 세우지만 안타깝게도 적들의 총탄에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전쟁 당시 학생들의 출정으로 비어 있던 교사는 국군 사단 본부로 사용됐고, 1951년 5월 20일에야 출전했던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서 학교로 돌아온 이들은 전선에서 싸우다 숨진 학도병과 교직원들의 혼을 기리는 충혼비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지켜만 볼 수 없기에 학업을 잠시 뒤로하고 친구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선 그들. 북한군에 맞서 용감히 전투를 치렀지만, 중과부적으로 적의 흉탄에 쓰러져 갔을 친구이자 전우였던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아려왔습니다.

 

 

충혼탑 우측 하단에는 전몰 학도병 38명이, 좌측 하단에는 순직 교직원 1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충혼탑 뒤편에는 ‘투필종융 충렬단고’(投筆從戎 忠烈千古: 학업을 중단하고 종군한 충렬은 길이 빛나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섰던 이들의 용기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을 추모하며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문을 나오는 길에 다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대한민국은 평소와 다름없이 한적하고 평화로웠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은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했던 참전용사들의 헌신적인 희생 덕에 가능했습니다.

 

비단 지금 소개해드린 고등학교에만 충혼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6·25전쟁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수많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전국 곳곳에 충혼탑이 건립돼 있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해준다면, 그들의 헌신적인 희생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