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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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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여군] "수원서 서울이 '시쳇길'… 지프차 이동때 온통 피범벅“

2020.06.22 조회수 402

[6·25 70년, 여군이 있었다] ①
백발의 원로 여군 대령, 6·25를 말하다

 

 

[저작권 한국일보]. 6ㆍ25전쟁 당시 여자의용군 1기로 입대한 임동순 예비역 대령이 5일 경기 시흥시 자택

벽면에 걸린 본인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국군, 인민군 할 것 없이 구덩이마다 시신이 넘쳐 도로에도 널려 있었어. 긴급 명령을 받아 마음이 급했던 지휘관이 ‘달려’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시체를 넘어간 거지.”

 

6·25전쟁 당시 지프차를 타고 수원에서 서울까지 ‘시쳇길’로 이동해야 했던 상황을 떠올리던 망백(望百ㆍ한국 나이 91세)의 예비역 임동순(90) 대령이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고르던 그는 “‘펑, 펑’ 시신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핏물이 얼굴까지 온 사방 튀었어. 나중에 도착하고 보니 군복이 다 핏물로 젖어 있었지”라고 덧붙였다. “당시엔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가슴 아팠던 건 말도 못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군가 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냐.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울음이 나.” 백발을 검게 염색하고 선글라스까지 낀 채 기자를 맞았던 여군 노병 표정이 비장해졌다.


북한 함흥에서 태어난 임 대령은 6·25가 일어나기 전 원산에 살았다. 하지만 월남을 한 뒤 1950년 9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여자의용군 교육대 1기생 44명 중 한 명으로 입대했다. 이북에 홀로 계시던 어머니는 원산여고를 졸업한 그에게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대학 가서 공부하라"며 격려하곤 했다. 월남과 전쟁 발발로 가족과 헤어진 임 대령이 군에 입대한 것도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는 국무총리를 겸직하고 있었던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 밑에서 근무하다가 교육을 마치고 같은 해 11월 소위로 임관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임관 후 생활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다. 그는 국방부 제3국에서 본부 지출대리관(현 지출관)으로 근무하면서 예산 지출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장병 급여는 사단에 직접 가서 지급해야 했다. 소나무를 잘라 만든 궤짝에 새 돈을 넣어 비행기나 군용 트럭을 타고 다니며 전달했다. 헌 돈은 부피가 나가 싣지 않았다. 임 대령은 “장교였고, 미군 측과 함께 이동해서 경호가 삼엄해 안전한 편이었지”라고 설명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6·25전쟁 당시 여자의용군 1기로 입대한 임동순 예비역 대령이 5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택은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군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패 및 사진들로 가득했다. 배우한 기자

 

 

생활이 안정되자 군 입대 목적이었던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졌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어머니가 계신 지역까지 전선이 회복되자 전방 사단 파견을 지원했다. 동기생인 박보희 소위는 원산으로, 김순덕 소위는 평양으로, 임 대령은 함흥으로 가게 됐다. 안전한 경로를 따라 헬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원산에 도착해 지프차를 타고 함흥으로 가던 도중 전황이 급변했다.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에 밀려 1950년 흥남 철수 작전이 막 진행 중이었다. 미군 제1해병사단과 유엔군, 국군 제1군단 등이 선박에 올랐고,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10만여명의 북한 주민이 몰려들었다.

 

임 대령이 기억하는 당시는 아수라장이었다. 몰려든 주민들은 악착 같이 미군 선박에서 내려 준 밧줄을 잡고 늘어졌다. 이 와중에 힘이 부친 사람들은 차가운 바다로 떨어졌다. 절박감에 울부짖는 소리, 흩어진 가족을 찾는 애절한 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처참한 광경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전쟁이란 이렇게 처참한 것이구나 했지.” 임 대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임 대령 일행은 배 타는 걸 포기한 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수송기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복귀한 임 대령은 계속 국방부 3국에 근무했다. 북한에 가서 만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다행히 피난민수용소에서 발견돼 함께 생활하다가 1953년 휴전을 맞았다. 

 

여자의용군 동기와 후배들이 결혼을 하는 등의 이유로 하나 둘 그만뒀지만 그는 곧바로 전역하지 않았다. 임 대령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일하느라 결혼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그는 이후 여군 훈련소 교수부장, 학생대대장, 2군 여군과장, 여군훈련소장 등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미국에 유학해 8개월간 초등군사반(초군반) 훈련도 받았다. 여군 창설 20주년인 1970년 여군처에서 이름을 바꾼 여군단 초대 단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시대의 요구에 어긋나지 않는 완전한 여성으로 여군을 길러냄으로써 훌륭한 어머니를 곳곳에 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2년 후 임 대령은 군복을 벗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6·25전쟁 당시 여자의용군 1기로 입대한 임동순 예비역 대령이 5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휴전 후 여군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깊었던 당시의 군 복무 소감을 묻자 임 대령은 “남자나 여자나 다른 게 뭐가 있어. 여자라고 봐주니 약해지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악물고 남자들 하는 것 다 해 내고 나서 군인으로서, 계급으로서 대우 받는 거야”라고도 했다. 

 

다만 결혼하면 사회생활을 정리해야 했던 시절에 대해선 아쉬워했다. “입대해서 잘 훈련시켜놨는데 시집 간다고 제대할 땐 정말 속상했다”며 “육아휴직도 없었고 결혼하고도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임 대령이 복무하던 당시엔 결혼 후 시댁과 친정 모두 제대하라고 하는 바람에 의무복무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갔다가 잡혀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여군이 늘어나자 여군을 아예 없애는 방안도 거론됐다고 한다. 

 

지난 5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2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는 인터뷰 도중 군 생활을 이야기할 때마다 열정이 넘쳤다. 손에는 미국 초군반 수료 당시 받은 반지 등 20여년 군 생활에서 얻은 반지 2개를 끼고 있었다. 주방을 겸한 응접실 벽에는 군 시절 받은 기념패와 사진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6·25가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전쟁이긴 했지만 나를 여군으로, 사람으로 만들었어. 이를 악물고 하면 남녀 떠나서 군인으로서 일하고 그에 따라 대우 받는 거지. 우리가 힘들게 여군 자리를 지켜낸 거야.”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