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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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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여군] 엄마 체육교사, 간호사도 뛰어든 6·25 전장

2020.06.22 조회수 413

[6·25 70년 여군이 있었다] ①
6·25 여군 활약상 살펴 보니

 

 


[저작권 한국일보].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여군도 창설됐다. 여군 의용군 1기인 임동순 예비역 대령의

집에 군에 복무하던 시절 사진이 빼곡히 걸려있다. 배우한 기자

 

 

여군은 1950년 6ㆍ25전쟁 발발 이후 공식 창설됐지만 대한민국 여군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부터 면면히 이어진다. 특히 6ㆍ25 당시 활약한 여군은 정식 모병을 거쳐 체계적 군사훈련을 거친 정규군이었다.


21일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와 안보경영연구원(SMI) 자료에 따르면  해방 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1948년 12월 남한 단독정부가 청년들의 좌익단체 가입을 막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조직하면서 사실상 여군 창설이 시작됐다. 학도호국단은 각 학교에 배치돼 학생 정치교육을 담당할 '배속장교'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1, 2기 배속장교 392명을 선발한 데 이어 3기 배속장교 32명을 발탁했다. 그런데 3기 전원이 여성으로만 구성됐다.

 

여군은 1950년 6ㆍ25전쟁 발발 이후 공식 창설됐지만 대한민국 여군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부터 면면히 이어진다. 특히 6ㆍ25 당시 활약한 여군은 정식 모병을 거쳐 체계적 군사훈련을 거친 정규군이었다.


21일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와 안보경영연구원(SMI) 자료에 따르면  해방 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1948년 12월 남한 단독정부가 청년들의 좌익단체 가입을 막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조직하면서 사실상 여군 창설이 시작됐다. 학도호국단은 각 학교에 배치돼 학생 정치교육을 담당할 '배속장교'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1, 2기 배속장교 392명을 선발한 데 이어 3기 배속장교 32명을 발탁했다. 그런데 3기 전원이 여성으로만 구성됐다.


이들 32명은 1949년 6월 훈련소에 입소해 제식훈련은 물론 총검술, 각개전투, 야외전술훈련 등 남성과 차이 없는 군사훈련을 마치고 같은 해 7월 전원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뒤 주로 여학교에 배정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련 교육을 담당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김현숙 예비역 대령(이하 예비역)과 하복조 중령 등 11명이 군으로 복귀해 여군부대 창설 준비에 뛰어들었다. 대구, 부산 지역에서 여군 모집 공고 벽보를 붙이고, 가두방송과 강연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500명 모집에 2,000여명이 지원했고, 이렇게 1950년 9월 창설된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부대인 '여자의용군'이다.

 

최초 지원자 500명 가운데 9명을 제외한 491명이 첫 여자의용군으로 거듭났다. 이후 4기까지 전쟁 기간 배출된 970명의 의용군이 행정지원, 첩보, 정훈, 전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여자 해병 75명, 항공병 26명, 간호장교 664명도 참전했다. 일부 여성은 유격대원, 예술대원 등으로 군번도 없이 참전했는데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이다. 명단 등록이 안 된 무명용사들까지 합치면 6ㆍ25 참전 여군은 약 2,400명으로 추산된다.

 

 

 

 

박을희 중령도 그들 중 하나다. 명성여중 체육교사 재직 중 전쟁이 나자, 4세짜리 아이를 충북 옥천 친정집에 맡기고 여자의용군 훈련대 교관으로 복무했다. 이어 훈련대 칼빈소총 중대장과 육군본부 제6중대 중대장을 역임하는 등 전쟁 초기 여군 창설ㆍ양성에 앞장섰다.


오금손 대위는  간호사로 일하다 입대했다. 그는 1950년 8월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 참가했고 북한군 기습에 맞서 싸워 6명을 사살했다. 일제 강점기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베테랑이기도 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K고지 전투에서 북한군 포로로 잡혔으나 고문에 굴하지 않고 탈출해 부대로 복귀한 불굴의 여전사로 이름을 날렸다. 2004년 74세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5,000회 이상 안보 강연을 다녔다.


이창애 의용군은 고등학생이었던 19세에 밴드부 선배 권유로 1950년 12월 자원입대했다.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전장 이곳 저곳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들고 누비며 1년여간 위문공연을 펼쳤다. 여군 존재 자체를 잘 알지 못했던 피난민들이 자신더러 “인민군 포로”라며 손가락질 하던 눈초리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여군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