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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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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여군] “소총 들고, 확성기 방송하고” 그 시대의 新여성 참전용사들

2020.06.23 조회수 2437

[6·25 70년, 여군이 있었다] ②
참전 여군이 전한 6·25 여군 활약상

 

 

[저작권 한국일보] 6·25 전쟁 당시 여자의용군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던 참전 용사들은 자신들을 "나라를 위해

앞서 나갔던 여성들"이라고 소개했다. 왼쪽부터 이점례, 조영희, 최선분, 권경열씨. 이한호 기자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귓가를 때려대던 총포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3년을 이어 온 6ㆍ25전쟁의 정전협정이 발효된 시각, 강원도 최전선은 적막에 휩싸였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벙커 바로 앞에는 적군이 쏜 포탄이 빗발쳤다. 같은 해 2월 육군 여자의용군 3기로 입대해 대적선전대에서 대북심리방송을 했던 조영희(84)씨는 그 때의 고요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전장에서 직접 목도한 전쟁의 참혹함이 70년 가까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6ㆍ25 당시 최전방에도 여군들이 있었다. 제 키 만한 총을 들었고, 직접 쓴 선전문을 밤낮으로 읽었다. 하다 못해 피 묻은 옷 빨래를 돕거나, 부대에서 공평한 배식까지 염려했던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며 끈끈한 전우애를 보여주는 4인의 여군 참전 노병들을 최근 만났다. 여자의용군 1기로 정훈장교를 지낸 이점례(88ㆍ중령)씨, 여자의용군 3기 동기생인 최선분(85ㆍ중령), 권경열(84), 조영희씨는 “여성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우리는 한 발짝 앞서갔던 사람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8,000명 지원한 여자의용군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은 여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마을에 살던 이웃이 바로 눈 앞에서 총살을 당했고, 어제까지 공부하던 학교는 무너져 내렸다. 피란길에는 폭탄에 깔린 사람도 마주해야 했다. 최선분씨는 “평화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18세 때 서울 종로2가의 병사구사령부(현 병무청)를 직접 찾았다.


경북 안동에서 사범학교를 다녔던 이점례씨는 북한군을 피해 머슴 차림을 하고 찾아간 영천의 군부대에서 여자의용군 1기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어머니도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게 낫다’며 ‘가라’고 말씀하셨다. 백발 노인이 막내딸 보내면서 길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 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며 이씨는 눈물을 훔쳤다.


1950년 9월 창설된 여자의용군 1기 모집에만 8,000명이 지원했다. 이씨는 30분이면 가는 영천에서 대구까지 30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헌병대의 심문을 받고 총소리를 피하다 보니 걸린 시간이었다. 영어 시험과 신체 검사를 거쳐 입교한 훈련소의 훈련은 “지독했다.” 몸집 차이에 따라 M1소총중대, 칼빈소총중대, 권총중대로 나뉘어 무기를 들었다. 각개전투, 집총훈련, 사격 등은 남자 간부후보생들이 받는 훈련과 동일했다. 훈련을 받고 나니 옷이 찢기고, 상처입은 몸에선 피가 났다. 권경열씨는 “군복이 없어서 미군한테 받은 걸 입다 보니 동복은 길이가 발등까지 닿았고, 신발도 내 발보다 훨씬 컸다”고 돌아봤다.

 

"죽는 건 겁나지 않았다" 전방 자원한 18세 여군
“내가 죽는 날까지 적군을 한 명이라도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혹독한 훈련을 견뎠는데, 이씨를 비롯한 동기생들은 당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가 첫 근무처였다. 한 달 내내 유리창의 때를 닦던 이씨는 육군본부의 소령에게 “전방에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18세 때였다. “전방 가면 하루 아침에 사람이 다 죽는다. 꼬마가 가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말에도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마침 육군은 여자 정훈장교를 신설하고, 1950년 11월 24일 정훈대대를 창설했다. 장교로 임관한 이씨는 정훈2대대에 배치받아 강원과 경북 등에서 대적활동을 맡았다. 그는 “황해도 사리원까지 올라갔는데 어디에서 총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논두렁에서 자곤 했다. 강원 영월에서는 인민군 부상자가 ‘어머니 저 먼저 갑니다’ 라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고 떠올렸다. 


조영희씨는 강원 양구ㆍ화천 근처 전방에서 대북 방송을 했다. 학교에서 웅변을 했던 실력을 밑천 삼아 대본도 직접 썼다. “여러분이 자유의 대한 품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단결해서 38선이 아니라 3만8,000선도 끊을 수 있습니다. 억압된 그 나라에서 지내지 말고 귀순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조씨는 70년 전에 쓴 글을 지금도 외우고 있었다. 구슬픈 노래를 불러 고향이 그리울 적군의 심리적 동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여군들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조씨는 “싸움이 너무 치열할 때는 약간 물러나 야전병원에 피란가 있기도 했는데 아비규환이었다”며 “의료 기술은 없지만 도울 수 있는 건 돕자고 해서 하다 못해 빨래라도 했다”고 말했다.

 

후방에서도 여군 기틀 닦아
후방에서도 여군들이 할 일은 적지 않았다. 1953년 2월 입교한 여자의용군 3기는 정식으로 행정업무 교육을 받은 첫 기수였다. 8주간 신체훈련을 마친 93명 전원이 대구 고급부관학교 행정37기로 입교해 교육을 받았다. 안과의사인 공병우(1906~1995)가 1949년 개발한 한글 타자기 사용법을 배운 타자병 1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타자기술을 예하부대에 공급하는 역할도 맡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012년 펴낸 ‘6ㆍ25 전쟁 여군참전사’를 통해 “정식으로 행정업무 교육을 수료하고 전문성을 가지고 근무함으로써 육군 여군이 현재까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전쟁이란 기억은 고통 그 자체다. 하지만 참전 여군 노병들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여전했다. "사춘기를 군대에서 보내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다"며 웃음 지을 여유도 있었다. 이들은 앞으로 더 훌륭한 후배 군인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다시 태어나도 군대에 가겠다”고 입을 모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